"할머님은 할아버님의 주검을 가묘를 만들지도 않고 인적이 드문 곳에 표시 안 나게 암매장하듯이 그렇게 모셔놓고해방 후에 시신을 정식적으로 묘소를 만들어 옮길 수 있었어요."
할아버님의 뒤를 이어 아버지와 큰 아버지, 두 분도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6.25사변 때, 아버지는 인민군 자위대로부터 고초를 겪었어요. 내가 국민학교 졸업할 나이여서 기억이 납니다.
좌익패하고 우익패가 6.25전쟁 전부터 굉장히 분쟁이 심했어요. 아버지는 우익이었고 인민군 빨치산은 좌익이잖아요. 6.25사변이 일어나니, 고향이 경북 영덕인데 포항의 청하면 월포리 해변까지 피난을 갔다가 23일만에 귀향을 했지요. 귀향을 하자마자 좌익패들이 아버님을 잡아갔어요. 아버님은 지서(경찰서)에 33일동안 수감되어 있었어요. 내가 30일 동안 아침 저녁으로 4키로를 걸어다니며 깡통에 담은 밥을 아버님께 가져다 드렸어요. 아버님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어요. 지서 입구에 밥을 가져다 놓으면 관리자들이 가지고 들어갔어요.
큰아버지는 할머니를 모셔야해서 피난을 갈 수가 없었어요. 인민군이 내려오자 바로 끌려갔는데 행방불명이 되었어요. 납북자 명단에 올라가 있어요. 인민군이 후퇴할 때 석방이 되었는데 영덕경찰서에서 영주 부석사까지 와서 일행들과 흩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그 이후로 소식이 없는거예요. 할머니께서 아흔 둘에 돌아가셨는데 생전에 맏아들 찾기를 간절히 원하셨지만 결국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제가 경험하거나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할머님, 아버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족이 독립운동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어요. 할아버님은 논을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고, 할머니 몰래 오셨다가 쓸만한 것을 가져가시고, 북간도나 이런 곳을 다니시면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기 끝내 희생되셨는데….
내가 69년도에 서울에 올라왔지만, 할아버지에 대해서 깊이 알아볼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아니었어요. 나 먹고 살기 위해 지방으로 다니던 때였어요. 내가 79세에 퇴직을 했어요. 퇴직을 한 후에 여기 저기 알아보고 광복회에도 참석하고 3.1절이나 8.15광복일 행사에도 참석했죠. 그 전에는 나 살기 위해서 아무것도 못했지요.
할머니께서 돈을 좀 벌어 놓으면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가져가셨데요. 그러다보니 할머니께서 고생을 엄청 많이 하셨대요. 할아버지 그렇게 돌아가셨지 큰아버지도 행방불명되었지. 차남인 우리 아버지도 6.25때 끌려가서 한 33일 정도 영창에서 살다 나오셨어요. 일제시대에는 일본놈들 피해다닐라 6.25사변 때는 점령군 인민군들이 괴롭히니까 피난을 가서 이집 저집 옮겨다니다 보니 국민학교 졸업도 못했어요. 수복 후에 졸업을 했어요. 동냥을 얻으러 다니면 작은 감자떡 세 개와 보리 한 줌 정도 줬어요. 얻으려는 사람은 많고 주는 사람은 적으니 빈곤하게 지냈지요.
일제시대에는 일본놈들 피해다닐라 6.25사변 때는 점령군 인민군들이 괴롭히니까 피난을 가서 이집 저집 옮겨다니다 보니 국민학교 졸업도 못했어요. 수복 후에 졸업을 했어요.
할아버님의 뒤를 이어 아버지와 큰 아버지, 두 분도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6.25사변 때, 아버지는 인민군 자위대로부터 고초를 겪었어요. 내가 국민학교 졸업할 나이여서 기억이 납니다.
좌익패하고 우익패가 6.25전쟁 전부터 굉장히 분쟁이 심했어요. 아버지는 우익이었고 인민군 빨치산은 좌익이잖아요. 6.25사변이 일어나니, 고향이 경북 영덕인데 포항의 청하면 월포리 해변까지 피난을 갔다가 23일만에 귀향을 했지요. 귀향을 하자마자 좌익패들이 아버님을 잡아갔어요. 아버님은 지서(경찰서)에 33일동안 수감되어 있었어요. 내가 30일 동안 아침 저녁으로 4키로를 걸어다니며 깡통에 담은 밥을 아버님께 가져다 드렸어요. 아버님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어요. 지서 입구에 밥을 가져다 놓으면 관리자들이 가지고 들어갔어요.
큰아버지는 할머니를 모셔야해서 피난을 갈 수가 없었어요. 인민군이 내려오자 바로 끌려갔는데 행방불명이 되었어요. 납북자 명단에 올라가 있어요. 인민군이 후퇴할 때 석방이 되었는데 영덕경찰서에서 영주 부석사까지 와서 일행들과 흩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그 이후로 소식이 없는거예요. 할머니께서 아흔 둘에 돌아가셨는데 생전에 맏아들 찾기를 간절히 원하셨지만 결국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제가 경험하거나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할머님, 아버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족이 독립운동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어요. 할아버님은 논을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고, 할머니 몰래 오셨다가 쓸만한 것을 가져가시고, 북간도나 이런 곳을 다니시면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기 끝내 희생되셨는데….
내가 69년도에 서울에 올라왔지만, 할아버지에 대해서 깊이 알아볼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아니었어요. 나 먹고 살기 위해 지방으로 다니던 때였어요. 내가 79세에 퇴직을 했어요. 퇴직을 한 후에 여기 저기 알아보고 광복회에도 참석하고 3.1절이나 8.15광복일 행사에도 참석했죠. 그 전에는 나 살기 위해서 아무것도 못했지요.
할머니께서 돈을 좀 벌어 놓으면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가져가셨데요. 그러다보니 할머니께서 고생을 엄청 많이 하셨대요. 할아버지 그렇게 돌아가셨지 큰아버지도 행방불명되었지. 차남인 우리 아버지도 6.25때 끌려가서 한 33일 정도 영창에서 살다 나오셨어요. 일제시대에는 일본놈들 피해다닐라 6.25사변 때는 점령군 인민군들이 괴롭히니까 피난을 가서 이집 저집 옮겨다니다 보니 국민학교 졸업도 못했어요. 수복 후에 졸업을 했어요. 동냥을 얻으러 다니면 작은 감자떡 세 개와 보리 한 줌 정도 줬어요. 얻으려는 사람은 많고 주는 사람은 적으니 빈곤하게 지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