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5월 22일 새벽 동이 트고 아버님이 모내러 나간 사이에 내가 태어났다고 들었어요.
저는 은평구 역촌동에 사는 최준호 입니다.
1940년 5월 22일 새벽 동이 트고 아버님이 모내러 나간 사이에 내가 태어났다고 들었어요. 당시에는 여기가 고향군 은평면 역촌리 였지요. 지금 연서로 큰길이 하천이었는데 하천을 경계로 이쪽은 ‘토물’, 저쪽은 ‘역말’ 이렇게 두 동네가 역촌1동 역촌2동이 되었다가 역촌동으로 하나가 됐죠. 옛날에 태어난 곳은 길 건너 북쪽이에요. 개천이 있었던 곳이고, 연서로가 개천을 덮어 생긴 길입니다. 그 하천(불광천)이 수색쪽으로 내려갑니다. 우리 어렸을 적에도 여름에 장마가 오게 되면 크게 물이 올라와요. 지금의 역촌동 푸르네마트 정도까지 논이어서 물이 차 올라왔었어요. 가을이 되면 주민들이 민물게가 내려가는 걸 발을 쳐놓아 잡았었지요.
당시 여긴 시골이었지만 일을 많이 하는 시골이었어요. 서울 중심지에서 가깝기 때문에 여기에서 땔 나무와 채소나 식재료를 겨울이고 여름이고 공급했지요. 지금은 온실이라 하지만 옛날에는 온상이라 해서 땅을 파서 한지 같은 종이로 덮개를 만들어 씌워 채소를 키워 팔았기 때문에 여름이고 겨울이고 노는 때가 없었어요. 힘들게들 살았지만 다른 시골 보다는 조금 낫게 살았습니다.
지금 16개동 이지만 당시에는 갈현리 역촌리, 포수말, 새동네, 세동네는 은평초등학교 그 아래쪽이고요. 그리고 포수마을 아래로 매바위, 수색, 고택골(지금의 증산동) 신사동이 토물이고 올라오면 구산리골이라고도 하는 노절이 자리잡고 있었어요.
노절 다음에 서울로 넘어가는데 거기가 국말이 그 길 건너서 갈현2동 쪽이 자올이고, 그 자올옆으로 해서 박석고개로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는 집이 거의 없었어요. 나는 녹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현동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니 그 시절 기억일 겁니다.
6.26 직전에 여기 역말에는 청년들이 많았어요. 청년들은 목총을 만들어서 군사 훈련을 해야 했고 여러 가지 인력으로 선발되어갔지요. 그러니 살림살이가 나쁘지 않았던 거지요.
동네에 전문학교를 나온 지주가 있었는데 김일성을 찬양하고 사라져버렸어요. 지주의 사상이 그러니 소작농들은 쉽게 동조했을 겁니다. 그 반면에 수국사 쪽, 국말이라 불린 곳인데 그 옆 자월하고 국말은 가난한 동네였어요. 이쪽 빨갱이 동네하고 그쪽 동네가 갈라서서 싸움이 벌어지는 거야. 어렸을 적에 초가에서 엄마하고 앉지도 못하고 쪼그리고 떨고 있었던 기억이 나요. 그게 뭔가 했더니 아랫 동네 사람들이 몽둥이와 삽을 들고 와서 집들을 전부 부수고 있었던 거였어요. 모조리 부숴버렸는데 우리 집은 무사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술을 좋아해서 아랫마을 사람들이 전부 형님 아우 먹는 술친구들이었던 거야. 그래서 우리 집은 건들지는 않았다고 해요.
그러고 나서 여기서도 그 동네로 가서 집을 부수는 그런 분위기에서 살았어요. 그러고는 6.25사변이 나서, 자진해서 넘어간 사람, 인민군으로 끌려간 사람이 더러 있었어요. 아랫마을 사람들은 사변 동안 잡혀서 절간에서 대부분 죽임을 당했어요.
지금 그 내력을 찾아내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어요. 작은아버지가 6.25 나기 전에 대한청년단장이었어요. 고양군 은평면 단위에서 당시에는 인텔리인데 그 명칭을 가지고 있다가 북한군이 점령하니 잡아가는 거야. 잡아가서 죽을 줄 알았더니 안 죽이고 앞잡이를 시키더라고. 그렇게 고양군을 관할하는 선전부장을 시키는 거야. 1.4 후퇴 때 넘어가셨는데 그러곤 연락이 두절 됐었고, 죽은 지 산지도 몰랐는데 이산가족 상봉 때 들은 얘기인데, 작은아버지의 처가집이 충남 예산이에요. 예산 양반이 이산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우리 작은아버지 소식을 들은 거야. 거기서 처가집 동네의 사람들하고 같이 있었던 거야. 이북에서 평안북도 도당위원장까지 한 거예요.
초상화가 있더라고 초상화하고 묘지하고 그 자손들의 사진을 가져왔더라고. 그래서 아주 놀랐어요.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관학교를 가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안 되더라고. 그때 연좌제가 있는지도 몰랐지. 뭔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연좌제에 걸려 있었던 거야. 그래서 아무튼 그런 사정들이 있어요.
지금 역촌역 자리가 냇가에요. 폭이 넓어요. 녹번동 쪽 말고 이쪽 역촌동 쪽으로 보면 핸드폰 가게가 있어요. 그 자리가 기생집 자리예요. 옛날에 주막인데 주막에 기생 놓고 술집했던 곳이었어요.
서오릉 쪽으로 가는 길이 있고 응암역 쪽으로 가는 길이 있고 사잇길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길이에요. 그게 원래 큰길이에요. 원래 길이예요. 그 고개 이름을 그놈고개라고 해요. 그놈고개에 이발소가 있었고 조그만 구멍가게들이 있었는데 거기서 오다가 죄측으로는 이북에서 넘어온 분인데 닭장을 하고 있었어요.
그 집 후손들이 지금 여기서 살고 있죠. 거기서 역촌역 지금 큰길을 따라서 서오릉, 구산역 쪽으로 가는 그 길, 역촌 사거리가 이어진 그 길이 작은 길이었어요. 그 길에서 사거리를 지나면 우측으로 일본 집이 하나 있었어요. 일본 사람들이 살던.
구산역으로 들어서면서 지금 예일여고 자리는 연근밭(연뿌리)과 벼를 심은 논바닥이었어요. 해방되던 해에 어른들이 연근 캐는데 데리고 가서 거기 앉혀놓고 참 먹을 때 술 조금 먹여가지고 제가 나가자빠져서 그 후로 술을 안 먹어요. 그때 어른들이 술 먹어라 해서 그때 혼이 나서 술을 안 먹는다고.
저는 여기서 살면서 그 당시에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어렵게 살았어요.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 계실 때, 아버지하고 대화가 없었어요. 아버지가 술을 너무 잡쉈기 때문에, 일을 안 하시고 술만 잡수니까 나는 싫은 거예요. 그렇게 생활해 오다가 어떻게 해서 이 공무원으로 들어가게 됐고 채신부 생활을 했어요. 대구 전신전화국에서 시작해서 영등포 전화국을 거쳐서 불광전화국으로 발령나 일하다 79년도에 그만뒀어요. 그러곤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지역사회에 봉사를 해보자고 지인이 권유하는 바람에 활동하다가 91년도에 지방의원을 한 거예요. 처음 지방자치제가 시작되면서 의회로 들어가 도시계획과 관련된 일들을 배워가면서 열심히 했지만, 우리나라 제도 자체가 국회는 국회의원 하나가 뭘 할 수 없듯이 지방의회는 지방의원 하나가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게 잘 이뤄지지를 않아요.
단체장과 지방의회가 서로 상호 견제의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견제 역할을 못하고 정당을 따라서 의사결정을 편들어서 하다 보니까 단체장이 어느 정당이냐에 따라 의회가 움직인단 말이에요. 그래서 지방의회에서 되는 게 없어요. 그래서 지방의회 무용론이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예산만 지금 1년에 50억에서 80억 쓴단말이야 지방의회 운용하는데 그럼 그 가치를 해야 되는데 그 가치를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지방발전을 하는데 단체장이 얼마만큼 제대로 인식을 하고 도시계획관리를 얼마만큼 하느냐에 따라서 거기에서 좌우가 되지 지방의원이 조금 더 한다고 해서 그게 좌우가 되질 않아요. 그래서 우리 은평구 같은 데는 지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제가 91년도에 구의원을 하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했냐 하면. 나는 여기서 태어난 곳이고 토박인데 내가 뭘 할 거냐 손가락질 받을 짓은 하지 않겠다. 올바로 가겠다. 라는 것으로 해가지고 기준을 잡아서 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별로 없어요. 그게 지금 지방자치를 들여다보면 지역사회가 변하는 것은 단체장의 역할에 크게 좌우된다. 단체장을 의회가 잘하면 견제할 수가 있는데 이게 제대로 역할 못하기 때문에, 의회가 절반이 잘려서 한쪽으로 붙어버리기 때문에 역할을 못해요.
그래서 지금 정당정치라고 해서 그런데 정당정치도 미국같은 데서는 안 그래요. 이 공천 자체를 갖다가 주민들 여론으로 해서 시작을 거지 상향식 공천을 하지 하향식 공천을 안해요. 상향식 공천을 하면 주민들 입맛에 맞게 만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가서 고개 숙이지 단체장한테 가서 고개 숙이지 않아요.
안타까운 것이 여기에서 태어난 친구들이 거기에 대한 인식을 갖지를 못해. 지역에 대한 애향심을 어떻게 표현을 하는지 저는 같은 친구라도 그걸 보지 못했어요.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다고. 예를 들어서 내가 동네에서 수백억을 가지고 잘 살아. 그러면 동네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부도 하고 동네 일에 참여도 좀 하고 이래야 되는데, 안해. 그런 것들이 일절 안 해 여기는 원래 사는 사람들이 그걸 안 해요. 지금 다른 동네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아는 한은. 관심이 없어요. 나밖에 모르는 것 같아. 궁말이란 동네에 사는 친구가 하나가 있는데도 수백억을 가지고 있어. 밥을 한번 사본 일이 없어. 돈에 관해서는 동네 일에 참여도 않고 나만 가지고 있는 거고, 나만 계산만 따지는 거지. 근데 그걸 하나하나 사람마다 다 들여다보고 저놈 어떤가 저놈 어떤가 알아봐도 마찬가지고 위의 선배들도 여기고 본향의 선배들도 보면 다 마찬가지예요.
저는 제 나이에 비해서 제 나이를 잊어버리고 나가서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어요. 지금도 내가 이 수색 동사무소에 웰다잉 교육을 받으러 다녀요. 보건소의 건강 학교에 다녀요. 어떤 강의가 있는 곳은 찾아다녀요. 주민자치회도 다니다가 그만뒀고 구청의 주민참여예산위원으로 한 2년 다니다가 그만두면서 여기를 또 들어가려고 하다 보니까 내가 잔소리를 많이 하니까, 잘못된 거 보이거든요. 내가 말하면 잔소리로 듣기 때문에 가기가 뭐해요. 동네 무슨 청소를 하든 뭘 하든 다 참여하고 싶은 거예요.
제가 16년 동안 의정활동을 하면서 외국에 한 번도 안 나갔다고 했잖아요. 제가 의장을 하면서 큰 승용차가 나오더라고요. 반납해 버렸어요. 왜, 의장은 은평구 관할에서 의장이지 바깥에서 의장이 아니다. 이건 낭비다. 반납하고 매각하라 했어요. 그래서 매각했어요. 구청장이 자기 차 멀쩡한 거를 바꾸겠다고 예산으로 올라와 100% 삭감해요. 아무 소리 못해요. 내가 스스로 그렇게 하니까 그걸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의원들이 밥을 먹으러 나갔는데 설렁탕을 시켰어요. 그런데 어떤 놈은 갈비를 먹는 거에요. 너는 왜 갈비를 먹냐. 설렁탕을 먹어야지. “니 돈이냐.” 그러는 거야. 거기서 싸움이 붙은 거예요. 의원들이라도 다 같은 의원이 아니지. 돈에 대한 인식이 없는 거예요. 나는 의회를 운영하면서 돈을 어떻게 분배해서 유용하게 쓰느냐. 이걸 가지고 해서 이번엔 이걸 먹자 했던 건데 때로는 갈비도 먹지. 근데 그걸 이해를 못하고 무조건 먹겠다는 거에요.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주민들이 선택을 해놨으니 지방자치가 잘 될 리가 없죠. 의정 활동을 하면서 처음에 시작 하기를 경실련 예산감시센타에서 강연을 들으면서 시작했어요. 시민사회단체다니면서 선거가 있다 그래서 친구가 나가보라 그래서 나온 건데 저는 여기에 나올 수 있는 재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에요. 근데 친구가 미국에서 돈을 조금 보내줬더라고. 나가보라고. 그래서 시작을 한 것이 4선을 한 건데, 참 안타까운 것이 저는 이 의정활동 하면서 지금도 생각하면 우리 주민들도 부족하고 앞에 나서는 사람도 부족하고 개중에는 권력을 가지고 오히려 돈을 뜯어먹으러 다니는 놈들도 있는 거야. 이런 별별 놈들이 많아요. 그 가운데서 나 혼자 괜히 여기 토박이입네 해서 자존심을 지켜야지 하며 뻣대고 살다가 지금까지 온 건데. 그렇다고 해서 후회된 것은 아니에요.
길 건너서 조금 올라가면 보신탕집이 유명한 데가 하나 있어요. 그 집이 그 당시에 담배꽁초 주워서 지은 집이에요. 통금 해제되면 나가서 명동, 을지로, 충무로를 돌아다니면서 담배꽁초를 줍는 영감님이 하나 있었어요. 그 영감님은 그 새벽에 그렇게 나가서 담배꽁초를 주워 가져와선 전부 이걸 베껴가지고 다시 담배를 만들어서 그걸 팔아서 돈을 모은 거예요. 자식들 공부도 안가리키고 아들 하나 있는데 그걸 같이 하는 거예요. 딸 둘이 있는데 딸도 같이. 그래서 그 집을 지은 거예요. 그 집 아들은 지금 시흥가서 살아요. 그리고 그 동네 통장 아들이 그 집을 산 거예요. 통장 아들이 사가지고 보신탕집을 만든 거예요. 오래 했어요. 지금은 장어집으로 바뀌어 있어요. 친구가 하던 곳인데 친구는 타계하고 아들이 하고 있어요.
기억나는 사람
이게 청어무성요시험무효형이라고 쓴 건데 방에 액자가 있어요. 뜻이 뭐냐면 ‘주민들은 소리가 없어도 들을 줄 알고 주민이 무엇을 원하는 볼 줄 안다.’는 의미인데 구청의 재무국장이란 사람이 써줬어. 저를 어떻게 봤든지간에 그거를 써서 보내 왔더라고. 내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처박아 놓은 거예요. 의정활동을 그만두고서 이걸 깨닫은 거에요. 이걸 써주신 분이 은평노인종합복지관의 서예 선생님이었었거든요. 그만 두시고 그걸 했어요. 근데 지금은 안 오신다 하더라고요. 지금 어디계신지 알아보고 있어요.
아버님이 모내러 나간 사이에
내가 태어났다고 들었어요.
저는 은평구 역촌동에 사는 최준호 입니다.
1940년 5월 22일 새벽 동이 트고 아버님이 모내러 나간 사이에 내가 태어났다고 들었어요. 당시에는 여기가 고향군 은평면 역촌리 였지요. 지금 연서로 큰길이 하천이었는데 하천을 경계로 이쪽은 ‘토물’, 저쪽은 ‘역말’ 이렇게 두 동네가 역촌1동 역촌2동이 되었다가 역촌동으로 하나가 됐죠. 옛날에 태어난 곳은 길 건너 북쪽이에요. 개천이 있었던 곳이고, 연서로가 개천을 덮어 생긴 길입니다. 그 하천(불광천)이 수색쪽으로 내려갑니다. 우리 어렸을 적에도 여름에 장마가 오게 되면 크게 물이 올라와요. 지금의 역촌동 푸르네마트 정도까지 논이어서 물이 차 올라왔었어요. 가을이 되면 주민들이 민물게가 내려가는 걸 발을 쳐놓아 잡았었지요.
당시 여긴 시골이었지만 일을 많이 하는 시골이었어요. 서울 중심지에서 가깝기 때문에 여기에서 땔 나무와 채소나 식재료를 겨울이고 여름이고 공급했지요. 지금은 온실이라 하지만 옛날에는 온상이라 해서 땅을 파서 한지 같은 종이로 덮개를 만들어 씌워 채소를 키워 팔았기 때문에 여름이고 겨울이고 노는 때가 없었어요. 힘들게들 살았지만 다른 시골 보다는 조금 낫게 살았습니다.
지금 16개동 이지만 당시에는 갈현리 역촌리, 포수말, 새동네, 세동네는 은평초등학교 그 아래쪽이고요. 그리고 포수마을 아래로 매바위, 수색, 고택골(지금의 증산동) 신사동이 토물이고 올라오면 구산리골이라고도 하는 노절이 자리잡고 있었어요.
노절 다음에 서울로 넘어가는데 거기가 국말이 그 길 건너서 갈현2동 쪽이 자올이고, 그 자올옆으로 해서 박석고개로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는 집이 거의 없었어요. 나는 녹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현동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니 그 시절 기억일 겁니다.
6.26 직전에 여기 역말에는 청년들이 많았어요. 청년들은 목총을 만들어서 군사 훈련을 해야 했고 여러 가지 인력으로 선발되어갔지요. 그러니 살림살이가 나쁘지 않았던 거지요.
동네에 전문학교를 나온 지주가 있었는데 김일성을 찬양하고 사라져버렸어요. 지주의 사상이 그러니 소작농들은 쉽게 동조했을 겁니다. 그 반면에 수국사 쪽, 국말이라 불린 곳인데 그 옆 자월하고 국말은 가난한 동네였어요. 이쪽 빨갱이 동네하고 그쪽 동네가 갈라서서 싸움이 벌어지는 거야. 어렸을 적에 초가에서 엄마하고 앉지도 못하고 쪼그리고 떨고 있었던 기억이 나요. 그게 뭔가 했더니 아랫 동네 사람들이 몽둥이와 삽을 들고 와서 집들을 전부 부수고 있었던 거였어요. 모조리 부숴버렸는데 우리 집은 무사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술을 좋아해서 아랫마을 사람들이 전부 형님 아우 먹는 술친구들이었던 거야. 그래서 우리 집은 건들지는 않았다고 해요.
그러고 나서 여기서도 그 동네로 가서 집을 부수는 그런 분위기에서 살았어요. 그러고는 6.25사변이 나서, 자진해서 넘어간 사람, 인민군으로 끌려간 사람이 더러 있었어요. 아랫마을 사람들은 사변 동안 잡혀서 절간에서 대부분 죽임을 당했어요.
지금 그 내력을 찾아내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어요. 작은아버지가 6.25 나기 전에 대한청년단장이었어요. 고양군 은평면 단위에서 당시에는 인텔리인데 그 명칭을 가지고 있다가 북한군이 점령하니 잡아가는 거야. 잡아가서 죽을 줄 알았더니 안 죽이고 앞잡이를 시키더라고. 그렇게 고양군을 관할하는 선전부장을 시키는 거야. 1.4 후퇴 때 넘어가셨는데 그러곤 연락이 두절 됐었고, 죽은 지 산지도 몰랐는데 이산가족 상봉 때 들은 얘기인데, 작은아버지의 처가집이 충남 예산이에요. 예산 양반이 이산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우리 작은아버지 소식을 들은 거야. 거기서 처가집 동네의 사람들하고 같이 있었던 거야. 이북에서 평안북도 도당위원장까지 한 거예요.
초상화가 있더라고 초상화하고 묘지하고 그 자손들의 사진을 가져왔더라고. 그래서 아주 놀랐어요.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관학교를 가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안 되더라고. 그때 연좌제가 있는지도 몰랐지. 뭔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연좌제에 걸려 있었던 거야. 그래서 아무튼 그런 사정들이 있어요.
지금 역촌역 자리가 냇가에요. 폭이 넓어요. 녹번동 쪽 말고 이쪽 역촌동 쪽으로 보면 핸드폰 가게가 있어요. 그 자리가 기생집 자리예요. 옛날에 주막인데 주막에 기생 놓고 술집했던 곳이었어요.
서오릉 쪽으로 가는 길이 있고 응암역 쪽으로 가는 길이 있고 사잇길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길이에요. 그게 원래 큰길이에요. 원래 길이예요. 그 고개 이름을 그놈고개라고 해요. 그놈고개에 이발소가 있었고 조그만 구멍가게들이 있었는데 거기서 오다가 죄측으로는 이북에서 넘어온 분인데 닭장을 하고 있었어요.
그 집 후손들이 지금 여기서 살고 있죠. 거기서 역촌역 지금 큰길을 따라서 서오릉, 구산역 쪽으로 가는 그 길, 역촌 사거리가 이어진 그 길이 작은 길이었어요. 그 길에서 사거리를 지나면 우측으로 일본 집이 하나 있었어요. 일본 사람들이 살던.
구산역으로 들어서면서 지금 예일여고 자리는 연근밭(연뿌리)과 벼를 심은 논바닥이었어요. 해방되던 해에 어른들이 연근 캐는데 데리고 가서 거기 앉혀놓고 참 먹을 때 술 조금 먹여가지고 제가 나가자빠져서 그 후로 술을 안 먹어요. 그때 어른들이 술 먹어라 해서 그때 혼이 나서 술을 안 먹는다고.
저는 여기서 살면서 그 당시에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어렵게 살았어요.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 계실 때, 아버지하고 대화가 없었어요. 아버지가 술을 너무 잡쉈기 때문에, 일을 안 하시고 술만 잡수니까 나는 싫은 거예요. 그렇게 생활해 오다가 어떻게 해서 이 공무원으로 들어가게 됐고 채신부 생활을 했어요. 대구 전신전화국에서 시작해서 영등포 전화국을 거쳐서 불광전화국으로 발령나 일하다 79년도에 그만뒀어요. 그러곤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지역사회에 봉사를 해보자고 지인이 권유하는 바람에 활동하다가 91년도에 지방의원을 한 거예요. 처음 지방자치제가 시작되면서 의회로 들어가 도시계획과 관련된 일들을 배워가면서 열심히 했지만, 우리나라 제도 자체가 국회는 국회의원 하나가 뭘 할 수 없듯이 지방의회는 지방의원 하나가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게 잘 이뤄지지를 않아요.
단체장과 지방의회가 서로 상호 견제의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견제 역할을 못하고 정당을 따라서 의사결정을 편들어서 하다 보니까 단체장이 어느 정당이냐에 따라 의회가 움직인단 말이에요. 그래서 지방의회에서 되는 게 없어요. 그래서 지방의회 무용론이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예산만 지금 1년에 50억에서 80억 쓴단말이야 지방의회 운용하는데 그럼 그 가치를 해야 되는데 그 가치를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지방발전을 하는데 단체장이 얼마만큼 제대로 인식을 하고 도시계획관리를 얼마만큼 하느냐에 따라서 거기에서 좌우가 되지 지방의원이 조금 더 한다고 해서 그게 좌우가 되질 않아요. 그래서 우리 은평구 같은 데는 지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제가 91년도에 구의원을 하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했냐 하면. 나는 여기서 태어난 곳이고 토박인데 내가 뭘 할 거냐 손가락질 받을 짓은 하지 않겠다. 올바로 가겠다. 라는 것으로 해가지고 기준을 잡아서 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별로 없어요. 그게 지금 지방자치를 들여다보면 지역사회가 변하는 것은 단체장의 역할에 크게 좌우된다. 단체장을 의회가 잘하면 견제할 수가 있는데 이게 제대로 역할 못하기 때문에, 의회가 절반이 잘려서 한쪽으로 붙어버리기 때문에 역할을 못해요.
그래서 지금 정당정치라고 해서 그런데 정당정치도 미국같은 데서는 안 그래요. 이 공천 자체를 갖다가 주민들 여론으로 해서 시작을 거지 상향식 공천을 하지 하향식 공천을 안해요. 상향식 공천을 하면 주민들 입맛에 맞게 만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가서 고개 숙이지 단체장한테 가서 고개 숙이지 않아요.
안타까운 것이 여기에서 태어난 친구들이 거기에 대한 인식을 갖지를 못해. 지역에 대한 애향심을 어떻게 표현을 하는지 저는 같은 친구라도 그걸 보지 못했어요.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다고. 예를 들어서 내가 동네에서 수백억을 가지고 잘 살아. 그러면 동네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부도 하고 동네 일에 참여도 좀 하고 이래야 되는데, 안해. 그런 것들이 일절 안 해 여기는 원래 사는 사람들이 그걸 안 해요. 지금 다른 동네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아는 한은. 관심이 없어요. 나밖에 모르는 것 같아. 궁말이란 동네에 사는 친구가 하나가 있는데도 수백억을 가지고 있어. 밥을 한번 사본 일이 없어. 돈에 관해서는 동네 일에 참여도 않고 나만 가지고 있는 거고, 나만 계산만 따지는 거지. 근데 그걸 하나하나 사람마다 다 들여다보고 저놈 어떤가 저놈 어떤가 알아봐도 마찬가지고 위의 선배들도 여기고 본향의 선배들도 보면 다 마찬가지예요.
저는 제 나이에 비해서 제 나이를 잊어버리고 나가서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어요. 지금도 내가 이 수색 동사무소에 웰다잉 교육을 받으러 다녀요. 보건소의 건강 학교에 다녀요. 어떤 강의가 있는 곳은 찾아다녀요. 주민자치회도 다니다가 그만뒀고 구청의 주민참여예산위원으로 한 2년 다니다가 그만두면서 여기를 또 들어가려고 하다 보니까 내가 잔소리를 많이 하니까, 잘못된 거 보이거든요. 내가 말하면 잔소리로 듣기 때문에 가기가 뭐해요. 동네 무슨 청소를 하든 뭘 하든 다 참여하고 싶은 거예요.
제가 16년 동안 의정활동을 하면서 외국에 한 번도 안 나갔다고 했잖아요. 제가 의장을 하면서 큰 승용차가 나오더라고요. 반납해 버렸어요. 왜, 의장은 은평구 관할에서 의장이지 바깥에서 의장이 아니다. 이건 낭비다. 반납하고 매각하라 했어요. 그래서 매각했어요. 구청장이 자기 차 멀쩡한 거를 바꾸겠다고 예산으로 올라와 100% 삭감해요. 아무 소리 못해요. 내가 스스로 그렇게 하니까 그걸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의원들이 밥을 먹으러 나갔는데 설렁탕을 시켰어요. 그런데 어떤 놈은 갈비를 먹는 거에요. 너는 왜 갈비를 먹냐. 설렁탕을 먹어야지. “니 돈이냐.” 그러는 거야. 거기서 싸움이 붙은 거예요. 의원들이라도 다 같은 의원이 아니지. 돈에 대한 인식이 없는 거예요. 나는 의회를 운영하면서 돈을 어떻게 분배해서 유용하게 쓰느냐. 이걸 가지고 해서 이번엔 이걸 먹자 했던 건데 때로는 갈비도 먹지. 근데 그걸 이해를 못하고 무조건 먹겠다는 거에요.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주민들이 선택을 해놨으니 지방자치가 잘 될 리가 없죠. 의정 활동을 하면서 처음에 시작 하기를 경실련 예산감시센타에서 강연을 들으면서 시작했어요. 시민사회단체다니면서 선거가 있다 그래서 친구가 나가보라 그래서 나온 건데 저는 여기에 나올 수 있는 재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에요. 근데 친구가 미국에서 돈을 조금 보내줬더라고. 나가보라고. 그래서 시작을 한 것이 4선을 한 건데, 참 안타까운 것이 저는 이 의정활동 하면서 지금도 생각하면 우리 주민들도 부족하고 앞에 나서는 사람도 부족하고 개중에는 권력을 가지고 오히려 돈을 뜯어먹으러 다니는 놈들도 있는 거야. 이런 별별 놈들이 많아요. 그 가운데서 나 혼자 괜히 여기 토박이입네 해서 자존심을 지켜야지 하며 뻣대고 살다가 지금까지 온 건데. 그렇다고 해서 후회된 것은 아니에요.
길 건너서 조금 올라가면 보신탕집이 유명한 데가 하나 있어요. 그 집이 그 당시에 담배꽁초 주워서 지은 집이에요. 통금 해제되면 나가서 명동, 을지로, 충무로를 돌아다니면서 담배꽁초를 줍는 영감님이 하나 있었어요. 그 영감님은 그 새벽에 그렇게 나가서 담배꽁초를 주워 가져와선 전부 이걸 베껴가지고 다시 담배를 만들어서 그걸 팔아서 돈을 모은 거예요. 자식들 공부도 안가리키고 아들 하나 있는데 그걸 같이 하는 거예요. 딸 둘이 있는데 딸도 같이. 그래서 그 집을 지은 거예요. 그 집 아들은 지금 시흥가서 살아요. 그리고 그 동네 통장 아들이 그 집을 산 거예요. 통장 아들이 사가지고 보신탕집을 만든 거예요. 오래 했어요. 지금은 장어집으로 바뀌어 있어요. 친구가 하던 곳인데 친구는 타계하고 아들이 하고 있어요.
기억나는 사람
이게 청어무성요시험무효형이라고 쓴 건데 방에 액자가 있어요. 뜻이 뭐냐면 ‘주민들은 소리가 없어도 들을 줄 알고 주민이 무엇을 원하는 볼 줄 안다.’는 의미인데 구청의 재무국장이란 사람이 써줬어. 저를 어떻게 봤든지간에 그거를 써서 보내 왔더라고. 내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처박아 놓은 거예요. 의정활동을 그만두고서 이걸 깨닫은 거에요. 이걸 써주신 분이 은평노인종합복지관의 서예 선생님이었었거든요. 그만 두시고 그걸 했어요. 근데 지금은 안 오신다 하더라고요. 지금 어디계신지 알아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