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은 예일여고 쪽에 가정을 꾸리시고 작은아버님은 동명여고 쪽에서 과수원을 하셨어요. 세명의 고모가 계신데 그 중 한 분이 남편을 따라 이북으로 가서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이제는 엄마, 아버지, 고모, 작은아버님 다 돌아가셨지요. 그 당시 이 지역에는 은평초등학교 하나 밖에 없었고 행정구역으로는 서대문구였어요. 나중에 은평구로 나뉘었어요. 학교를 가려면 논밭길 걷고 불광천을 건너야 했어요. 비가 많이 오면 개천에 물이 불어나 학교에 갈 수가 없었어요. 장마철에는 휴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성장했고 결혼해서 부산에서 3년 살다가 서울로 다시 오게 되었는데, 이왕이면 친정에 와서 살자고 마음먹고 지금까지 은평에서 80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옛날에 대조동에는 대추나무가 많았어요. 집집마다 대추나무가 있었지요. 그래서 대춧말이라 불렸어요. 주변 마을도 포수말, 궁말 이렇게 불렸지요. 연신내는 예전에도 연신내로 불렸지요. 양천리, 독박골도 예전 그대로지요. 독바위역 쪽 마을을 독박골이라 하는데 그쪽에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막아 수영장을 크게 만들어 놨었어요. 냇가를 따라 올라가 조약돌 밑에 가재를 잡거나 아래 논밭으로 가서 메뚜기, 미꾸라지 따위를 잡았었지요.
은평초등학교에 다닐 때 소풍을 가는 곳은 서오릉과 진관사 두 군데뿐이었어요. 6년 내내 봄과 가을 걸어서 거기만 갔어요. 졸업식 때는 강당이 없어서 마리아수녀원(지금의 꿈나무마을)강당을 빌려 졸업식을 했어요. 그 후로 불광초등학교, 대조초등학교, 역촌, 구산초등학교 등이 생겨났지요.
옛날에는 호롱불을 켜기 위해 석유를 큰 유리병에 사와야 했어요. 산골고개 언덕베기에 짱구네 집에서 석유를 팔았어요. 호롱불에 기름을 채워 넣고 그렇게 짧은 밤을 보내야했어요.
예전에는 세검정에 자두밭이 있었어요. 자하문에요. 거기가 복숭아 자두가 많았어요. 그 시절 중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애들은 하얀 브라우스에 곤색 치마를 입었어요. 마땅히 입을 사복도 없던 시절이라 일요일 같은 휴일에도 그냥 교복을 입고 놀러 다니는 거죠. 중학교 2학년 때, 7월17일 제헌절이었는데 그때 공휴일이잖아요. 그때 자두가 한참 익었을 때, 친구들과 자하문으로 갔어요. 언덕에는 복숭아밭 자두밭이 펼쳐져 있었어요. 친구들과 자두를 먹고 놀다가, 옛날엔 비닐봉투가 없잖아요. 종이봉투에다 자두를 담아서 돌아오려는데, 소나기를 맞게 되었어요. 간신히 버스에 타긴 했지만 비에 젖은 종이봉투가 터져버려서 교복 치마로 감싸야 했어요. 그런데 자두가 너무 농익어서 물크러지고 터져버렸지 뭐예요. 교복이 물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스 간에서 웃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함께 웃던 네 친구 중 둘은 죽고 하나도 건강이 안 좋아서 요양원에 가 있고 나만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자두 먹던 추억을 친구들은 기억을 못하더라고요. 나 혼자만의 추억이 되어서 그때 생각이 나면 혼자 웃고 그래요.
그러고는 평탄하게 그냥 잘 지내온 것 같아요. 이렇게 학교에 다니다가 우리 세대만 해도 결혼하면 모임 같은 것이 없었잖아요. 애들 학교 학부형들하고 조금 어울리는 것이 전부였죠. 더러는 강남에 부동산 바람이 불었을 때 그쪽으로 이사를 가더라고요. 우리는 여기를 떠나면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그냥 평탄하게 욕심 없이 여지껏 살아왔어요.
저는 욕심도 없이 감사하면서 지내요. 복지관에서 하루에 한 번, 한 시간씩 운동하고 악기도 배우고 그림도 그리면서.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봉사하면서 아프지 말고 여생을 보내면 좋겠어요. 처음 복지관 활동을 시작하면서 풀도 뽑고 벽돌도 나르고 화장실 청소부터 설거지 등 봉사 안 한 게 없어요. 지금까지도 몸이 불편해서 밥 잡수러 못오시는 양반들 전화 상담을 해주고 있어요.
주민들과는 왕래가 많으셨나요?
우리 세대 남편들은 아내가 나가는 걸 싫어했지요. 절대적이었지. 그런 건 상상도 못 했죠. 부녀회나 마을활동이란 것은 60대, 50대부터 있었지. 우리 70, 80대는 그저 집에서 애들 기르는 것, 남편 뒷바라지하는 것이 전부였지. 다들 그러고 살았어요. 우리 세대는. 제일 억울한거야. 그런 데다가 자식들한테 효도도 못 받지.
우리가 마지막 세대잖아요. 우리는 노인네들 봉양했고 시어머니 시아버지를 봉양했고 우리가 마지막 세대라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자식들한테 그걸 받냐고 못 받잖아요. 지네들은 지네들끼리, 시어머니가 반찬을 해다 줘도 다 갖다 버린다잖아요. 아, 그런 것을 보면 너무 서글퍼요. 우리는 얼마나 아끼면서 살았는데. 지금도 집에서 이렇게 못 쓰는 거 있으면 너무 아까워서 못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딸내미가 확 버려. ‘엄마 내가 다 내가 사줄께.’ 그러면 걔가 간 다음에 다시 아파트에 다시 줏어다 놓는다니까. ‘엄마, 내가 버렸는데 이게 또 여기 와있어.’ 걔 간 다음에 다시 줏어오는거야. 없애 버리면 또 쓸 일이 생겨요. 안 쓸 것 같지만. 애들은 그렇게 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더라고. 내 딸이지만, ‘야!, 며느리랑 같이 사는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안 맞을까? 며느리 하고 안 사는 게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해요
복지관에서 즐거움을 찾으시나요?
재미도 찾고 건강도 찾았지요. 안해본 게 없어요. 실버 모델도 하고 음악교실에서는 노인들 한 20명씩 매주 한 번씩 가리키기도 하고 공연도 하고 양로원에 가서 노래도 해주고 그랬죠. 병원 같은 데 가서 노래도 하고 그러면 너무너무 좋다고, 잘한다고 그러니까 보람도 느끼고 그랬죠. 그리고 매일 한 시간씩 강당에서 에어로빅부터 요가 등 안하는 운동이 없어요. 60대 초반까지만 해도 매일 2시간씩 했는데 지금은 못하겠더라고.
아버님은 예일여고 쪽에 가정을 꾸리시고 작은아버님은 동명여고 쪽에서 과수원을 하셨어요. 세명의 고모가 계신데 그 중 한 분이 남편을 따라 이북으로 가서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이제는 엄마, 아버지, 고모, 작은아버님 다 돌아가셨지요. 그 당시 이 지역에는 은평초등학교 하나 밖에 없었고 행정구역으로는 서대문구였어요. 나중에 은평구로 나뉘었어요. 학교를 가려면 논밭길 걷고 불광천을 건너야 했어요. 비가 많이 오면 개천에 물이 불어나 학교에 갈 수가 없었어요. 장마철에는 휴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성장했고 결혼해서 부산에서 3년 살다가 서울로 다시 오게 되었는데, 이왕이면 친정에 와서 살자고 마음먹고 지금까지 은평에서 80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옛날에 대조동에는 대추나무가 많았어요. 집집마다 대추나무가 있었지요. 그래서 대춧말이라 불렸어요. 주변 마을도 포수말, 궁말 이렇게 불렸지요. 연신내는 예전에도 연신내로 불렸지요. 양천리, 독박골도 예전 그대로지요. 독바위역 쪽 마을을 독박골이라 하는데 그쪽에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막아 수영장을 크게 만들어 놨었어요. 냇가를 따라 올라가 조약돌 밑에 가재를 잡거나 아래 논밭으로 가서 메뚜기, 미꾸라지 따위를 잡았었지요.
은평초등학교에 다닐 때 소풍을 가는 곳은 서오릉과 진관사 두 군데뿐이었어요. 6년 내내 봄과 가을 걸어서 거기만 갔어요. 졸업식 때는 강당이 없어서 마리아수녀원(지금의 꿈나무마을)강당을 빌려 졸업식을 했어요. 그 후로 불광초등학교, 대조초등학교, 역촌, 구산초등학교 등이 생겨났지요.
옛날에는 호롱불을 켜기 위해 석유를 큰 유리병에 사와야 했어요. 산골고개 언덕베기에 짱구네 집에서 석유를 팔았어요. 호롱불에 기름을 채워 넣고 그렇게 짧은 밤을 보내야했어요.
예전에는 세검정에 자두밭이 있었어요. 자하문에요. 거기가 복숭아 자두가 많았어요. 그 시절 중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애들은 하얀 브라우스에 곤색 치마를 입었어요. 마땅히 입을 사복도 없던 시절이라 일요일 같은 휴일에도 그냥 교복을 입고 놀러 다니는 거죠. 중학교 2학년 때, 7월17일 제헌절이었는데 그때 공휴일이잖아요. 그때 자두가 한참 익었을 때, 친구들과 자하문으로 갔어요. 언덕에는 복숭아밭 자두밭이 펼쳐져 있었어요. 친구들과 자두를 먹고 놀다가, 옛날엔 비닐봉투가 없잖아요. 종이봉투에다 자두를 담아서 돌아오려는데, 소나기를 맞게 되었어요. 간신히 버스에 타긴 했지만 비에 젖은 종이봉투가 터져버려서 교복 치마로 감싸야 했어요. 그런데 자두가 너무 농익어서 물크러지고 터져버렸지 뭐예요. 교복이 물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스 간에서 웃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함께 웃던 네 친구 중 둘은 죽고 하나도 건강이 안 좋아서 요양원에 가 있고 나만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자두 먹던 추억을 친구들은 기억을 못하더라고요. 나 혼자만의 추억이 되어서 그때 생각이 나면 혼자 웃고 그래요.
그러고는 평탄하게 그냥 잘 지내온 것 같아요. 이렇게 학교에 다니다가 우리 세대만 해도 결혼하면 모임 같은 것이 없었잖아요. 애들 학교 학부형들하고 조금 어울리는 것이 전부였죠. 더러는 강남에 부동산 바람이 불었을 때 그쪽으로 이사를 가더라고요. 우리는 여기를 떠나면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그냥 평탄하게 욕심 없이 여지껏 살아왔어요.
저는 욕심도 없이 감사하면서 지내요. 복지관에서 하루에 한 번, 한 시간씩 운동하고 악기도 배우고 그림도 그리면서.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봉사하면서 아프지 말고 여생을 보내면 좋겠어요. 처음 복지관 활동을 시작하면서 풀도 뽑고 벽돌도 나르고 화장실 청소부터 설거지 등 봉사 안 한 게 없어요. 지금까지도 몸이 불편해서 밥 잡수러 못오시는 양반들 전화 상담을 해주고 있어요.
주민들과는 왕래가 많으셨나요?
우리 세대 남편들은 아내가 나가는 걸 싫어했지요. 절대적이었지. 그런 건 상상도 못 했죠. 부녀회나 마을활동이란 것은 60대, 50대부터 있었지. 우리 70, 80대는 그저 집에서 애들 기르는 것, 남편 뒷바라지하는 것이 전부였지. 다들 그러고 살았어요. 우리 세대는. 제일 억울한거야. 그런 데다가 자식들한테 효도도 못 받지.
우리가 마지막 세대잖아요. 우리는 노인네들 봉양했고 시어머니 시아버지를 봉양했고 우리가 마지막 세대라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자식들한테 그걸 받냐고 못 받잖아요. 지네들은 지네들끼리, 시어머니가 반찬을 해다 줘도 다 갖다 버린다잖아요. 아, 그런 것을 보면 너무 서글퍼요. 우리는 얼마나 아끼면서 살았는데. 지금도 집에서 이렇게 못 쓰는 거 있으면 너무 아까워서 못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딸내미가 확 버려. ‘엄마 내가 다 내가 사줄께.’ 그러면 걔가 간 다음에 다시 아파트에 다시 줏어다 놓는다니까. ‘엄마, 내가 버렸는데 이게 또 여기 와있어.’ 걔 간 다음에 다시 줏어오는거야. 없애 버리면 또 쓸 일이 생겨요. 안 쓸 것 같지만. 애들은 그렇게 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더라고. 내 딸이지만, ‘야!, 며느리랑 같이 사는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안 맞을까? 며느리 하고 안 사는 게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해요
복지관에서 즐거움을 찾으시나요?
재미도 찾고 건강도 찾았지요. 안해본 게 없어요. 실버 모델도 하고 음악교실에서는 노인들 한 20명씩 매주 한 번씩 가리키기도 하고 공연도 하고 양로원에 가서 노래도 해주고 그랬죠. 병원 같은 데 가서 노래도 하고 그러면 너무너무 좋다고, 잘한다고 그러니까 보람도 느끼고 그랬죠. 그리고 매일 한 시간씩 강당에서 에어로빅부터 요가 등 안하는 운동이 없어요. 60대 초반까지만 해도 매일 2시간씩 했는데 지금은 못하겠더라고.